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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한국 역사 속의 전쟁 이재범 경기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2015.05.22
한국 역사 속의 전쟁





1. 들어가는 말

우리 역사는 아주 많은 전쟁들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그다지 전쟁을 교육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전쟁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회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한반도는 언제나 전쟁에 노출되어 있고, 어느 지역보다도 전쟁에 휘말리기 쉬운 지정학적 조건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이에 대한 대처도 적절하지 않다. 최근 군 내부의 무기 구입과정에서의 부정부패와 총기 난사 사건 및 예비군 훈련장에서의 사고는 현재 우리의 안보 불감 의식과 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한국 역사 속에서의 전쟁을 살펴 봄으로서 미래에 대한 우리의 대외적인 안전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확인해보고자 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2. 전쟁이란 무엇인가?

국가간에 자국의 의사를 상대국에 강요하기 위해 수행되는 조직적인 무력투쟁 혹은 폭력행위의 상태. 국제법에서는 식민지 지배 및 외국의 점령, 인종차별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이른바 ‘민족해방전쟁’과 한 국가에서 2개 이상의 정치적 권력집단간의 무력투쟁도 전쟁에 포함시키고 있다. 전쟁은 군사적 측면의 무력투쟁뿐만 아니라, 비군사적 측면인 정치·외교·경제·심리·사상 및 과학기술 등도 무력수단과 마찬가지로 전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원인으로서는 ① 권리의 회복 및 보호, ② 주요 국가 이익의 보호 및 유지, ③ 세력 균형의 유지, ④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념의 전파·말살 또는 보호, ⑤ 영토의 획득에 의한 국가의 영향력 및 세력의 증대, ⑥ 정복욕의 충족 등을 꼽았다.

전쟁의 유형은 침략전쟁·자위전쟁·제재전쟁(또는 응징전쟁)·식민지전쟁·민족해방전쟁·독립전쟁·혁명전쟁 등이 있다. 지역적 규모의 기준에서는 세계전쟁·국지전쟁으로 구분된다. 무제한전쟁(또는 전면전쟁·절대전쟁)과 제한전쟁, 핵전쟁과 비핵전쟁(또는 재래식 전쟁), 정규전쟁과 그렇지 않은 비정규전쟁이 있다.



3. 우리나라의 역대 주요 전쟁



(1) 통일신라 이전



① 조선·한 전쟁:한의 무제가 기원전 109년 초 서해의 무역을 중개무역으로 이익을 추구하였던 조선(위만)을 공격한 침략전쟁. 한은 육군 5만 명, 수군 7,000명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1년여의 전투를 전개한 끝에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으로 끝났다. 한은 군현을 설치하였다.



② 여수·당전쟁(麗隋唐戰爭):고구려의 서진과 수·당의 동진이 충돌하여 발생한 전쟁. 수나라는 598년(영양왕 9) 고구려의 요서(遼西)지역 공격에 대응하여 수륙군 30만여 명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보급선 마비와 질병으로 실패하였다. 수의 양제는 612년(영영왕 23) 113만의 대군으로 공격하였으나 요동성에서 수개월 동안 저지 당하였으며, 그 뒤 살수에 이르렀으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살수대첩으로 퇴각하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4)부터 요하 국경선에 1,000여 리의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646년(보장왕 5)에 이를 완성하였다. 당태종은 644년 10여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왔으나, 안시성에서 60여 일간의 교전 끝에 퇴각하고 말았다. 당태종은 647·648·655년에 거듭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수·당을 물리쳤으나, 그 전쟁 수행과정에서 국력이 많이 고갈되었다.



③ 나당전쟁(羅唐戰爭):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무열왕 7)과 668년(문무왕 8)에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였으나, 당나라가 무리하게 신라에 대하여 군사활동과 내정 간섭을 하므로 당과의 일전을 벌였다. 670년 7월 구백제지역 주둔 당나라 군을 공격하여 80여 성을 탈취하였고, 671년 사비성(泗沘城:부여) 및 웅진성(熊津城:공주) 방면을 점령하였으며 677년 매소성전투(경기도 연천)에서 당나라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신라는 실질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전쟁기념관 처인성전투 기록화





(2) 고려시대의 전쟁



① 고려와 거란의 전쟁:거란은 993년 10월 소손녕(蕭遜寧)으로 하여금 80만의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으나, 서희(徐熙)는 외교담판으로 강동6주를 차지하였다. 그 뒤 거란은 강동6주 반환을 요구하며, 1010년(현종 1) 11월 40만 명으로 침공해 왔다. 고려는 통주에서 저항하였으나 패하였고, 1018년에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대군으로 제3차 고려에 침입을 하였으나 강감찬(姜邯贊)이 귀주대첩에서 크게 승전하였다. 그 결과 1019년에 강화를 맺어 양국은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② 고려의 여진정벌:11세기 후반에 만주 북부 완안부(完顔部) 여진의 강성으로 고려와 충돌하게 되었다. 1104년(숙종 9) 1월 윤관(尹瓘) 등을 보내어 방비하게 하였으나 여진의 기병에 대비하지 못하여 패전한 뒤 별무반 17만 병력을 파견하여 130여 마을을 점령하여 9성을 축조하였으나 여진의 반환요구와 거리가 멀어 경영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109년 7월 돌려 주었다.



③ 고려의 대몽항쟁:몽골이 1231년 8월 살례탑(撒禮塔)을 선봉으로 하여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는 강화천도를 하여 결사항전 하였다. 몽골은 1254년의 침략 때 포로로 붙들어 간 남녀만도 20만여 명이나 되었다. 고려는 몽골의 항전을 포기하고 1269년 4월 태자가 몽고로 출발하여 항복의 뜻을 표하고, 1270년(원종 11)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때 삼별초의 대몽항전이 있었고, 이후로 고려는 원의 간섭기에 들어갔다.



④ 고려와 왜구 : 14세기초에 일본의 내전으로 인하여 발생한 해외 침략은 왜구로 이어졌다. 왜구는 약 40년간 고려의 해안을 괴롭히며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3) 조선시대의 전쟁



① 임진왜란·정유재란:1592년(임진년) 4월 14일의 임진왜란과 1597년 1월에 14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많은 도공들과 포로들을 데려갔다. 또한 이총과 같이 조선인의 신체를 잘라가 매장하여 두었다.



② 정묘호란·병자호란:1627년(인조 5) 1월의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다. 청은 조선이 조공을 하지 않는다고 1636년 12월 용골대(龍骨大) 등을 보내어 황제로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사신을 만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자 침략전쟁을 벌였다. 남한산성에서 저항하였으나, 다음해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송파)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 역사상 큰 치욕이었다.



③ 병인양요·신미양요: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도를 탄압하지 않았으나, 1866년(고종 3) 1월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와 신도 8,00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프랑스 군대가 침입한 전쟁이 병인양요이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학살에 가까운 전투를 벌인 사건이 신미양요이다.



(4) 항일독립운동

1919년 3·1운동 후 항일무력투쟁이 만주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1920년까지 군사활동이 가장 활발했는데, 만포진 공격 및 두만강 연안에서의 유격전, 그리고 청산리전투는 일본군과 대항한 독립군에게 혁혁한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어 1944년 8월 28일 독자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고, 또한 항복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킬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5) 대한민국과 전쟁

① 6·25전쟁:1950년 6월 25일에 소련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이 남한의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시도한 침략전쟁. 그 시각에 따라 많은 견해가 있으나 현재는 북한의 침략전쟁이라고 판단한다.



② 한국군의 월남(베트남)파병:1964년 7월 15일 월남(지금의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에 의해 최초로 그 해 9월 1개 의무중대와 소수의 태권도교관단 파견을 시작하여 전투부대가 파견되었고, 1973년 3월 23일에 철수하였다. 만 7년 5개월간의 월남 파병은 군사상, 경제상, 국제관계에서 여러 가지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월남전 참전의 결과는 4,800여 명의 인명 희생(고엽제 등)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4. 나가는 말

한국 역사 속의 전쟁은 몇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공격전, 방어전, 파견군 등 다양한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 거의 대부분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방어전이라는 성격이었다. 또한 정규군과 함께 의병의 활동이 굉장히 활발하였다.

이러한 한국 역사 속의 전쟁의 특성을 살펴 본다면, 우리나라는 언제나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정학적 위치이며, 실제로 그러한 사례는 너무 자주 나타남을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살펴 보았다.

그리고 한국사에서의 전쟁은 언제나 대규모 전쟁이었다. 앞에서는 청일·러일전쟁과 같은 경우는 사례에 넣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세계대전이 한반도에서 발발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전쟁에 대한 이해는 더욱 폭을 넓혀서 구체적으로 교육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에 대한 준비와 함께 외교 능력을 발휘하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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