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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능행, 또 다른 수원을 만들다 한동민 수원박물관 2014.11.7
(수원로의 개설)



정조 이래 순종 황제까지 6대에 걸쳐 조선 후기의 모든 임금들은 수원을 찾았다. 다른 도시가 갖지 못하는 수원만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능행이 수원을 수원답게 만들었던 셈이다. 그 능행길은 ‘수원별로(水原別路)’로 일컫는 큰 길이었다.

정조 이후 모든 조선의 국왕은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왕위가 계승되었다. 따라서 융릉과 건릉을 찾는 능행은 더욱 확고한 것이 되었고, 수원의 정치적 위상과 문화적 역량을 강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조선 후기 전국적 도로망은 서울을 중심으로 6대로(大路) 혹은 10대로 체제였다. 1770년 여암 신경준(申景濬)이 편찬한 「도로고(道路考)」의 6대로와 김정호가 만든 󰡔대동지지(大東地志)󰡕(1864) 「정리고(程里考)」의 10대로가 그것이다. 신경준의 6대로 가운데 제5로 ‘제주로(濟州路)’는 김정호의 제8대로인 ‘해남로(海南路)’와 일치한다. 서울에서 서남쪽으로 수원을 거쳐 해남-제주까지 가는 길이다.



서울에서 동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 남태령-과천-사근내-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을 거쳐 남쪽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다. 수원의 주요한 통과지점은 지지대에서부터 화성행궁을 지나 매교를 거쳐 하류천-대황교를 지나는 길이니, 이 길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顯隆園)을 찾아가는 정조 임금의 거둥길이었다. 특히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수원에서 성대하게 거행하는 것을 계기로 남태령을 넘는 험한 길을 버리고 노들나루에서 시흥-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오는 또 다른 큰 길을 새롭게 열었다. 이름 하여 ‘수원별로’이니, 정조 이후 조선의 모든 임금들이 찾았던 길이다.



수원 읍치가 붂쪽 팔달산으로 이동하기 전에는 서울에서 남쪽으로 빨리 가고자 하는 경우 수원읍을 거치지 않고 유천(버드내)를 지나 죽미고개를 넘어 오산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한강에서 양재를 거쳐 판교-용인- 김량장을 거쳐 오산으로 가는 길도 주요한 통로였다.





그러나 수원의 읍치가 북상하면서 수원은 확실하게 제주로(해남로)의 직선으로 통과하는 지점에 위치하면서 교통의 분절점으로 각광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원별로는 수원을 거쳐 남쪽으로 가는 주요 간선도로인 삼남대로(三南大路)의 첫 큰 줄기가 되었다.



이후 기존의 해남로(제주로)에 더하여 경상도로 가는 길도 수원을 거쳐 가게 만들면서 수원의 지리적·역사적 위상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까지 경상도에서 서울로 오가는 길은 상주-새재(조령)-충주-죽산-양재-한양으로 가는 이동로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 경상감영이 상주에서 대구로 바뀌면서 경상도에서 서울로 오가는 길은 대구-김천-추풍령-청주-천안-수원으로 이어지는 축선으로 이동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수원의 군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수원의 지리적 중요성도 재발견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정조의 수원별로의 확장은 더욱 확실하게 교통의 요충지 수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는 길목인 수원의 지리적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수원 주막에서 난 소문 전국에서 다 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수원이 교통의 요지임을 알려 주고 있다.



(교통의 요지 수원)



더욱이 1905년 경부선 철로의 개통과 서울-목포 사이의 1번 국도가 이 길을 따라 부설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수원대로’의 개설은 이후 수원을 경기남부의 대도회지로 확실하게 부상하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셈다. 이후 수원은 경기도의 수부도시로 경기남부의 안성장과 서울 송파장으로 연결되는 용인 김량장을 아우르며 경기 남부의 지배적 상권을 갖는 대도회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읍치 이후 수원의 지리적 위상)



󰡔대동여지도󰡕(1861년)





정조 이래 조선의 모든 국왕이 수원을 찾았지만 특히 마지막 순종황제의 1908년 능행과 1914년 거둥은 기차를 타고 왔다 간 하루 만의 능행이었다. 순종황제는 1908년 10월 2일 새벽 6시 궁궐을 출발하여 7시 남대문역에서 기차에 승차하였다. 배종한 문무 관헌들과 함께 1시간 가량 운행한 기차는 8시 대황교(大皇橋)에 임시 정거장에 내렸다. 대황교에서부터 원래의 능행로를 따라 융릉과 건릉을 참배하한 뒤 오후에 권업모범을 시찰하고 5시 50분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하여 6시 30분에 환궁하였던 것이다.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고 난 뒤 순종황제는 1914년 또 한 차례의 수원 능행을 하고 있다. 나라가 망한 이후라서 그 능행은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에 마차에서 내려 남대문역으로 기차를 타러 가는 순종의 사진을 단신으로 전하고 있다. 장엄했던 능행이 하나의 에피소드로 전락했음을 보여 주는 순간이다.



순종황제의 1908년과 1914년 마지막 능행은 기차를 이용한 것으로 이제 세상이 변했음을 보여 준다. 순종황제의 능행은 기차를 타고 하루 만에 왔다가는 것이었는데, 정조 이래로 국가적 행사로 며칠에 걸쳐 치러지던 장엄한 능행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지지대를 넘는 수원별로의 느릿하고 장엄한 능행은 기차 길이 새롭게 열리면서 또 다른 시간과 속도로 수원을 훑고 지나갔다. 새로운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기적소리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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