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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동아시아의 영토분쟁과 고지도 속의 동해와 독도 오일환 경희대 혜정박물관 학예실장 2012.11.09
동아시아의 영토분쟁과 고지도 속의 동해와 독도



1. 동아시아의 영토분쟁과 고지도의 현대적 의미

근대국가의 성립 이후 민족 간의 영토 분쟁이 지속되고 문화와 환경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면서 지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영토는 역사의 연속성 속에 나타나는 민족의 생활 흔적이 스며있는 경계의 공간인데, 이를 종합적으로 표현한 것이 지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영토는 민족과 역사성, 현재적 상황, 국제법상의 조건 등을 충분하게 종합적으로 갖추어져야 스스로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가 글로벌화 되고 있다 할지라도 지역 블록화의 필요성이 증대하면서 아세안 국가회의나 서방 정성회의 등이 결성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중국은 개혁 개방에 따른 경제적 자신감으로 정치 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해양 국가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하여 해양 군사력을 증강하며 조어대와 북방 4개 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대항해를 시작하면서 형성된 탐험과 시장 개척으로 인해 남겨진 식민지의 잔재 유산의 결과가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 및 일본과 영토 경계의 획정에 대한 역사문제로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더욱 중요하다.







2. 서양고지도 속의 울릉도, 독도

우리나라에서 작성된 고지도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는 제작자와 제작 년대가 불확실한 것이 적지 않기 때문에 서로 혼동되어 지명표기가 간혹 뒤바뀌기도 한다. 독도獨島라는 명칭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하여 행정지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경상북도에 편입되어있다. 독도를 ‘전라도 사람들은 ‘독섬’으로 발음하고 있으며 울릉도 주민들도 ‘독섬’ 또는 ‘돌섬’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독도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512)년에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에 따라 우산(于山)이라는 명칭에 포함되었다. 이처럼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시대부터 우산국을 비롯하여 우산도, 조선시대는 삼봉도(三峰島1471년), 가지도(可支島1794년), 석도(石島1900년)등으로 표기되었다.



서양에서 제작된 고지도에 울릉도와 독도는 서세동점기인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의 탐험선박들이 동해에 출현하기 시작하여 서양식 이름이 붙게 되었다. 우산도를 천산도로 잘못 표기하면서 중국어발음인 챤찬타오Tchian chan tao로 표기하고 있으며 울릉도는 판링타오Fan ling tao로 표기하고 있다.



1710년대 프랑스 레지 신부가 울릉도(fan ling tao), 우산도(tchian chan tao)로 표기하였다. 이는 조선왕실에서 가져온 지도와 1709년 청나라 역관이 소지한 경도 지도를 참고한 것이다. 레지 신부는 1698년 마카오 도착(1663-1738)John Bapt Regie 雷考思한 후 중국 만주지역(1709-1711)과 강남지역을 측량 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이 후 1735년 프랑스 뒤 알드 <지나지> 4권에 소개하였는데 레지의 <조선왕국의 지리 역사>(1720년 출간)에 근거하였으며 1736년 영역본 출간으로 인하여 서양세계에 우리나라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737년 당빌 <중국신지도첩>: fan ling tao 좌측 아래에 tchian chan tao로 기입되면서 레지 작성의 조선국도를 삽입하였다. 이는 강희제의 요청으로 예수회 선교사 중심으로 1708-1717년간 중국전토를 측량하여 지도로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방항로를 탐험하기 시작하면서 동해에 대한 서양 선박들은 1787년 프레류(Fleurieu)가 작성한 프랑스 군함학교 라 페루즈함대의 르포트 다쥴레Lepaute Dagelet가 발견하면서 <탐사항해도>에 Fan ling, Tchian chan로 기록되면서 울릉도가 Dagelet으로 서방세계에 최초 등장하게 되었다. 북위37.25 동경129.2( 실제 131.22) 1789년에는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콜넷James Colnett이 발견하여 탐험선박의 명칭인 아르고나우트I.Argonaut를 울릉도의 이름으로 표기하기도 하였으나 착오였다. 1791년 영국 콜넷트(colnett)는 울릉도를 배의 명칭인 Argonaut 표기하였는데 북위37.52 동경 129.53 이 후 1811년 애로우스미스 지도에 나타났다. 또한 1797년 브로우튼이 동해안 탐사하면서 Fan ling, Tchian chan가 사라지고 울릉도가 Dagelet로 표기되었다.



이 후 1840년 씨볼드(siebold)가 일본식 명칭으로 Dagelet(마쓰시마), Argonaut(다케시마)라고 병기하였다. 하지만 1852년 TAKOSIMA 혹은 Argonaut 섬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록: 프랑스 Capricieuse가 두 번 지나갔으나 발견하지 못함(37.52/129.53)

독도는 1787년 5월 울릉도와 함께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나 1849년 프랑스 고래잡이 선박 리앙꾸르(liancourt)호가 독도(우산도)를 리앙끄르 암(rocks)으로 표기하였으며 1854년 푸자친의 지휘로 러시아 군함 팔라다(palladals)호에 의하여 독도가 정확하게 측정되었으며 메날라이 올리브차(menalai and olivutsa rocks)암으로 명명되었다. 또한 1855년 영국 군함 호네트(honet)호의 해군 중령 파시드가 지휘하면서 독도를 북위37.14 동경131.55 측정하여 호네트 암(rocks/Hornet islands)으로 표기하였다.



1861년 영국 해군성 수로부 <지나수로지>에 기록되었고 1873년 F.W.Jarrad <지나해 수로지>4권에 성인봉이 북위37.30 동경 130.53로 표기되었다. 이 뿐 아니라 간혹 등장하였던 아르고너트 섬 Argonaut에 대한 내용이 공식적으로 삭제되었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竹島(다케시마)로 표기하여 시마네현(島根縣)으로 편입하면서 독도문제를 발생시켰다. 17세기 후반(1667)에 울릉도를 竹島, 독도를 松島로 표기하였으며 19세기 중반(1840) 시볼드 이후 울릉도를 松島로 표기하면서 을릉도와 독도에 대한 표기에 혼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1880년 일본 군함 天城호의 정밀측량을 바탕으로 울릉도를 松島로 표기하여 정착시키면서 1905년 독도를 竹島로 표기하여 편입한 것이다.



일본은 17세기 후반까지 울릉도를 竹島(다케시마), 독도를 松島(마쓰시마)라고 한자식 표기를 사용하였으나 19세기 중반 시볼드가 항해하면서 울릉도를 Dagelet(마쓰시마), 독도를 Argonaut(다케시마)로 병기함으로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 후 일본 군함 天城호는 1880년 정밀 측량하여 울릉도를 松島로 고착화하였고 1905년에 독도를 竹島로 표기하여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하여 한ㆍ일간의 영토분쟁이 되었다.



미국 지명위원회(BGN)는 현재 독도Dokdo를 섬이 아닌 바위로 규정하면서 리앙쿠르트암Liancourt Rocks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일방적으로 점령하면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1952년 독도에 대한 주권을 대내ㆍ외에 선언하였고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확고히 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또한 미국 지명위원회는 독도를 한국령에서 주권미지정지역으로 변경하였고 리앙쿠르트암으로 공식명칭을 수정하였다. 그러나 독도는 유엔해양법 협약이 정한 섬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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