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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한반도의 역사의 여명 : 구석기문화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2011.06.03
한반도의 역사의 여명 : 구석기문화



1. 구석기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



구석기시대는 지구상에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고인류가 처음 등장하여 돌을 깨뜨려 연모(뗀석기)를 제작·사용하였던 약 250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로 인류문화에서의 가장 원시적인 단계이다. 구석기시대가 차지하는 시간적 범위는 인류역사의 99.6%에 해당하며, 하루 24시간에 비교한다면 구석기시대가 끝나는 때는 밤 11시 55분쯤에 해당한다.





구석기시대는 지질학상 신생대 제4기 갱신세(更新世, Pleistocene)에 속하는데, 갱신세는 특히 빙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시기로 흔히 빙하시대라고도 불린다. 구석기시대 사람의 삶의 배경이 되었던 갱신세 동안에는 빙하기와 간빙기가 번갈아 나타나며 생태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이러한 자연환경의 변화에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슬기롭게 적응하면서 연모(석기·뼈·나무 등)를 만들어 사냥·채집을 하면서 강가나 언덕에 막집을 짓고 동굴생활을 하면서 문화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왔다.



우리나라에 구석기시대와 그 문화가 존재하였음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은 1930년대이나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올바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후 1960년대 초 함북 웅기 굴포리유적과 충남 공주 석장리유적의 발굴조사를 계기로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올바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1974년에 이르러서야 국정 “국사”교과서에 “구석기시대”가 설정됨으로서 비로소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와 문화에 대해 올바로 인정받게 되었다.



2. 잃어버린 우리나라의 구석기문화 : 온성 강안리유적 발굴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유물이 처음 발굴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1932년 함경북도 온성군 강안리(종성군 동관진) 일대에서 일제는 조선의 문물을 약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철도공사를 진행하던 중 짐승화석이 발견되었고, 1933년에는 짐승화석과 함께 흑요석 석기 2점을 찾았다. 이 유적은 1935년 발굴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의 최초 발굴조사로 기록된다.



두만강에서 약 1km쯤 떨어진 강 언덕 비탈면에 위치한 강안리유적의 발굴에서 털코끼리, 털코뿔소, 하이에나, 사슴, 들소, 말 등의 짐승화석과 뿔연모, 뼈연모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짐승화석 중 젖먹이짐승은 모두 추운 지역에 살았던 짐승들로 밝혀져 당시의 기후는 추운 때였음을 알려주며, 유적은 마지막 빙하기의 늦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당시 일제강점기의 시대상황으로 강안리유적의 유물이 구석기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 유적이 구석기시대로, 출토유물이 구석기문화로 올바로 평가 받기까지는 20여년이 지난 1958년 김정학교수가 지질학, 고생물학적 특징을 바탕으로 「한국에 있어서의 구석기문화의 문제」『고려대학교 문리논집』이라는 논문에서 이 유적의 시대성격을 구석기시대로 밝혔다. 당시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부정했던 우리나라에서 강안리유적과 유물을 구석기시대로 인정한 것은 우리나라 구석기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 한반도 역사의 여명을 열다 : 웅기 굴포리유적 발굴



웅기 굴포리유적이 학계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47년이다. 그러나 함북 웅기군 노서면 굴포리 서포항동에 자리한 이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60~1962년까지 조개더미를 중심으로 신석기·청동기시대 문화층을 조사하였고, 1962년 가을 신석기시대 조개더미층 아래 붉은 찰흙층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뗀석기 1점을 발굴하였다. 이를 계기로 1963년 발굴에서 마침내 구석기시대 문화층과 석기를 만들던 자리를 찾았고, 1964년 계속된 조사에서 집자리를 발굴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2개의 구석기 문화층이 찾아졌는데, 아래층을 “굴포문화 Ⅰ기”, 위층은 “굴포문화 Ⅱ기”로 설정하였다. Ⅰ기층에서 막집터자리와 석기를 만들어 모루와 격지, 찍개·긁개·찌르개·자르개·몸돌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Ⅱ기층에서는 찍개·밀개·부정형석기·격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굴포리유적은 우리나라 학자에 의해 구석기시대 사람의 살림터인 집자리와 그들이 제작·사용한 도구를 찾아 한반도 역사의 여명을 여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굴포리유적이 발굴된 이듬해인 1964년에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구석기시대 유적인 공주 석장리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1973년까지 10년간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전기~후기 구석기시대까지의 문화가 층위적으로 발달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석장리유적에서는 슬기슬기사람의 살림터인 집자리와 풍부한 석기가 출토되었고, 30,690B.P., 20,830B.P.의 방사성탄소 절대연대값을 얻어 당시로서는 이 유적이 지닌 중요성을 높게 하였다.



이처럼 1963·64년에는 북한의 굴포리유적과 남한의 석장리유적이 발굴되었고, 이들 유적의 발굴결과와 연구 성과로 우리나라의 인류문화 기원이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힐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구석기학의 자생적 기반이 형성되었다.



4. 한반도 인류문화의 기원 50만 년 전 : 상원 검은모루 동굴유적 발굴



1960년대 전반의 굴포리와 석장리유적 등 한데유적(open site)의 발굴로 우리나라에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확인하였다면,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는 상원 검은모루 동굴유적(1966~70년), 상원 청청암 동굴유적(1969~70년), 평산 해상 동굴유적(1969~70년) 등 동굴유적(cave site)에 관심을 갖고 조사하여 갱신세 짐승화석과 자연환경 등 구석기문화 연구의 폭을 넓혀 나갔다.



평남 상원군 상원읍 흑우리 검은모루 동굴은 상원읍에서 3km쯤 떨어져 있으며 굴은 길이 약 30m로 동서로 뻗어 있다. 이 유적에서는 29종의 다양한 짐승화석과 석기가 출토되었고, 29종의 짐승화석 중 물소·큰쌍코뿔소·상원말·큰곰·동굴곰·하이에나·코끼리·호랑이 등 사멸종이 18종으로 사멸종의 비율이 가장 높다. 출토된 짐승화석을 생태적 특성에 따라 1)삼림성 짐승(승양이, 큰곰, 멧돼지 등), 2)초원성~삼림성초원형 짐승(큰쌍코뿔소, 말, 사슴 등), 3)강·늪 가까이 사는 짐승(해리, 물소, 들쥐 등), 4)열대~아열대성 짐승(물소, 원숭이, 코끼리 등)의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석기는 제작수법상 모루망치떼기, 부딪쳐떼기, 직접떼기, 외날수법 등의 원시적인 수법으로 만든 주먹도끼모양 석기, 제형석기, 뾰쪽끝 석기, 반달모양 석기 등이 보고되었다.



검은모루 동굴유적에서 출토된 짐승화석은 종적구성이 다양하고 사멸종의 비율이 높은 특징을 보이며 그 연대를 40~50만 년 전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 이 시기에 해당하는 고식의 수법으로 만든 석기가 출토되었다는 점 등으로 학계에서 크게 주목 받았으며, 당시까지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인식하였다. 북한에서는 이 유적의 발굴로 우리나라에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고, 이후 중기-후기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발전하였다는 기본체계를 세우게 된다. 현재 이 유적의 연대를 북한에서는 60만 년 전으로 올려 잡고 있으나, 우리 학계에서는 이 유적의 짐승화석 및 석기 분류체계와 신뢰성에 대해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기도 한다.



이후 북한에서는 1980년대 중반까지 동굴유적을 중심으로 25곳의 구석기시대 유적을 발굴하였으나, 1990년대 이후로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구석기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 보고가 없으며, 남한에서 1990년 이후 구석기시대 유적의 조사와 연구가 급증한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5. 구석기시대 문화의 주인공 “사람”을 찾다 : 덕천 승리산 동굴유적 발굴



1972~73년에 이루어진 승리산 동굴유적의 발굴은 구석기시대 문화의 주인공인 사람 화석을 찾아 구석기시대 연구의 큰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평남 덕천시 승리산의 동남방향으로 대동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승리산 동굴은 입구 너비 7m, 높이 7.5m, 길이 62.2m로 입구 쪽이 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점차 좁아지는 모습이다. 이 동굴의 발굴에서 31종의 짐승화석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구석기시대의 사람 화석이 출토되었다. 사람 화석은 중기 구석기시대와 후기 구석기시대로 보고된 2사람 뼈가 발굴되었는데, 중기 구석기시대 사람 화석을 “덕천 사람”,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 화석을 “승리산 사람”이라 명명하였다.



덕천 사람은 오른쪽 아래 첫째 어금니와 왼쪽 위턱 두 번째 큰 어금니, 어깨뼈 등 3점으로 네안데르탈 계통의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어금니의 씹는 면은 거의 닳은 상태이다.

승리산 사람은 어금니 2개가 남은 거의 완전한 아래턱뼈가 출토되었는데, 뼈의 체질인류학적 특징으로 볼 때 슬기슬기 사람에 해당하며 35살쯤의 성인 남자로 보고 있다.



이후 북한에서 구석기시대 사람화석은 평양을 중심으로 잘 발달되어 있는 석회암지대에 형성된 동굴에서 집중 발굴되었다. 대현동 동굴유적(1977년)에서는 28종의 짐승화석과 함께 중기 구석기시대의 슬기사람(Homo sapiens) 단계에 해당하는 7~8살의 어린아이 뼈가 출토되었다. 이 사람은 “역포 사람”이라 명명하였다.

만달이 동굴유적(1979~80년)에서는 13종의 짐승화석, 흑요석·차돌·규암으로 만든 석기, 사슴뿔로 만든 뼈연모 등과 함께 후기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의 사람인 “만달 사람”화석이 나왔다. 만달 사람은 25~30살 정도의 남자이다.



용곡 동굴(1980~81년)의 제1호 동굴은 굴 입구 너비 5~6m, 높이 3m, 길이 40m로 구석기시대 문화층(1~4층)와 신석기시대 문화층(5층)이 존재한다. 구석기시대 문화층에서 표범, 쌍코뿔소, 곰, 사슴, 너구리 등의 짐승화석과 석영, 사암, 화강암으로 만든 석기, 불을 피워 생활하였던 12곳의 불 땐 자리 등과 함께 무려 10사람이 넘는 사람 화석이 출토되었다. “용곡 사람”으로 명명된 사람 화석은 슬기슬기 사람(Homo sapiens sapiens)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용곡 사람 중 보존상태가 좋은 3호, 7호 사람의 머리뼈를 분석한 결과 위 얼굴은 비교적 넓은 편이고, 앞머리뼈가 좁고 너비가 비교적 큰 계란형 윤곽을 지니고 있으며, 전형적으로 긴머리에 해당한다. 또한 머리뼈의 높이는 현대 우리나라 남자의 머리뼈 높이와 비슷하나 동북아시아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 화석과는 구별되는 매우 높은 머리를 지니고 있음이 용곡 사람 머리뼈의 중요한 특징으로 밝혀졌다. 이밖에 평양 금천 동굴유적과 평남 풍곡리 동굴유적에서 슬기슬기사람에 속하는 사람뼈 화석의 출토가 보고되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충북 단양 상시 1바위그늘에서 20살쯤의 슬기사람(Homo sapiens) 단계에 속하는 “상시 사람”화석과 충북 청원 두루봉 흥수굴에서 5살쯤의 슬기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인 “흥수아이” 화석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남·북한에서 중기 구석기시대~후기 구석기시대의 사람 화석이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체질적 특징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곧선사람(Homo erectus) 화석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



6. 구석기시대의 도구 : 석기



인류가 처음으로 만든 도구는 석기이다. 최초의 사람(Homo) 속으로 분류되는 손쓴사람(Homo habilis)은 250만 년 전에 출현하였는데, 이 단계에 돌을 이용하여 인류 최초의 도구(석기)를 만들었다. 석기는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이후 금속을 이용하기 전까지 돌을 이용하여 만든 도구로 인류문화발달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석기제작 기술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인류의 체질적 진화과정과 더불어 복잡하면서도 일정한 체계를 갖추게 된다. 따라서 석기의 발달정도에 따라 구석기시대를 전기 구석기시대(250만~12만5천 년 전), 중기 구석기시대(12만 5천~4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4만~1만 년 전)로 구분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구석기시대의 도구는 거의 대부분이 석기이다.



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는 직접떼기·모루떼기 수법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처음으로 돌을 깨는데 사용한 방법이다. 이러한 석기제작 수법은 구석기시대 전 기간에 걸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석기제작에도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주로 제작 사용한 석기는 찍개, 주먹도끼, 자르개, 찌르개, 사냥돌 등으로 비교적 크고 무거운 편에 속한다.



중기 구석기시대에는 석기제작기술이 발달하여 긁개, 뚜르개, 톱니날석기, 새기개 등의 석기가 나타나고, 격지를 보다 정교하게 잔손질하는 기술이 나타난다. 후기 구석기시대는 구석기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로 벽화·조각 등의 예술 활동과 몸을 꾸미는데 쓰이는 각종 장신구 의 제작 등과 함께 간접떼기, 눌러떼기, 돌날떼기 등 새로운 석기제작기술이 나타난다. 이러한 기술로 만든 석기는 용도에 따라 밀개, 긁개, 슴베찌르개, 뚜르개, 돌날, 좀돌날 등 종류가 다양해지고 크기도 소형화하며 수량도 많아진다.



구석기시대의 주요한 도구인 석기는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모든 석기가 일일이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동일한 기능을 갖는 석기로 분류되어도 만든 사람, 암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서로 다른 형태를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은 형태상의 특징과 제작수법 등에 의하여 구석기시대 석기는 수십 가지로 나눠진다.



한편 북한의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석기가 출토된 유적으로는 한데유적으로 굴포리유적과 강안리유적, 동굴유적으로 검은모루 동굴유적과 용곡 동굴유적 등으로 매우 제한되어 있고, 출토 석기의 수량도 많지 않다. 그러나 북한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로 분류하고 있는 검은모루 동굴유적의 석기는 5점이 보고되어 있을 뿐이며, 석기분류와 석기로서의 신뢰성에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7.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살림터 : 집자리



구석기시대의 생활은 끊임없는 이동생활을 전제로 삶을 꾸려간 시기임으로, 당시의 살림터는 나무나 돌을 이용한 임시 주거형태이거나 자연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가운데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석회암지대에 잘 발달되어 있는 자연동굴을 살림터로 삼았을 것이다. 금평동굴, 화천동 동굴, 랭정동굴, 용곡 동굴유적의 동굴 안에서 불에 탄 흙과 뼈, 불자리 등 불 땐 흔적이 남아 있고 사람뼈 화석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면 일정기간 동굴에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 동굴을 제외한 한데유적에서 집자리가 확인된 것으로 보고된 유적은 웅기 굴포리유적의 굴포문화 Ⅰ기층의 집자리가 유일하다. 평면형태는 긴네모꼴이고 규모는 11.5×8m로 모룻돌과 50여 점의 격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석기제작과 관련 있는 집으로 판단하고 있다.



남한의 구석기시대 한데유적에서 찾아진 집자리는 공주 석장리유적, 제천 창내유적, 화순 대전유적, 동해 노봉유적 등이 있어 당시 집의 규모와 짜임새를 가늠할 수 있고, 대전 용호동유적과 장흥 신북유적, 청원 노산유적 등에서는 땅을 얕게 파고 강자갈돌을 배치하였으며 숯조각이 집중된 야외 화덕자리가 확인되었다.



8. 맺으며



우리나라 역사의 여명은 최북단 두만강가의 온성 강안리유적에서 짐승화석과 인류 행위의 산물인 석기, 뼈연모, 뿔연모 등이 발굴된 것으로부터 그 기원을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과 강안리유적을 발굴·연구한 학자가 일본의 관학자라는 점에서 사실이 부정되고 역사가 왜곡된 채 잃어버린 역사로 남게 된다. 이후 1958년 김정학 교수가 강안리유적을 구석기시대로 주장하였으나 당시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우리 학계의 분위기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인 1963년 북한의 웅기 굴포리유적, 1964년 남한의 공주 석장리유적이 발굴된 10년 후인 1974년 국정교과서에 “구석기시대”가 설정되어 공인됨으로서 비로소 우리 역사의 기원이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935년 강안리유적이 발굴된 지 꼭 40년 만에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뒤 찾게 된 것이다. 이후 북한에서는 1960~70년대에 동굴유적을 집중 조사하여 덕천 승리산 동굴유적에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람뼈 화석을 찾아 구석기 연구의 새로운 장을 펼치게 되며, 상원 검은모루 동굴유적의 발굴로 역사의 상한을 50만 년 전으로 끌어 올리게 된다. 그러나 북한의 구석기 고고학은 1990년대 이후로 유적 발굴이나 연구 활동이 매우 미약한 실정이다.



현재와 같이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학술교류, 인적교류는 물론 북한의 구석기 유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유물 분류와 연구결과에 대한 신뢰성에 대해 남한 학계에서 비판적인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여 우리나라 구석기학의 체계화에 큰 문제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극복하여 구석기문화 연구에 새로운 길이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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