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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정조의 화성건설의 의의 김준혁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2010.11.19


화성은 1997년 12월 4일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창덕궁과 더불어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및 판전, 종묘 등에 이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화성의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등재가 된 것은 군사 건축적 측면이 강조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화성의 세계문화유산으로의 가치는 당시대의 가장 우수한 군사시설물이라고 하는 것뿐 아니라 건축 기법 및 재료상의 특징도 포함 되어있다. 또한 화성 축성에 담긴 과학 정신 및 축성 기법과 다른 국가의 축성의 장점을 포용하여 우리것화 하는 문화 통합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신에 입각한 축성의 전반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라는 역사적인 기록물에 의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또한 화성은 단순한 성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정조는 1793년 1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며,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하였다. 정조는 부(富) ․ 수(壽) ․ 다남자(多男子)가 깃들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긴 중국의 화봉삼축(華奉三祝)의 고사를 인용하며 수원의 지명을 화성으로 개명하고 도시 기반시설을 정비하였다.



화성축성에는 축성을 지휘하는 국왕 정조로부터 축성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군민일치를 통한 민본주의의 이념이 실현되었다. 정조는 축성 노동자들을 위하여 음식을 베풀어 주고 의복을 제작하여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다양한 부분들이야말로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수원 지역이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태어나는데 시금석이 될 것이다.







화성은 일본 및 유럽의 성(城)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중 화성은 세계유산 등록기준 ⅱ) 한 시대나 하나의 문화권을 통해 건축, 기념물, 문화환경 부문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ⅲ) 소멸된 문명이나 문화전통에 대해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한 사례, 적어도 예외적인 증명이 되는 것에 근거하여 등재되었다.



특히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는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초기 군대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다.’ 라고 하였으며, 국제기념물유적협회는 ‘화성은 18세기 군사건축물을 대표하여 유럽과 극동아시아의 성제의 특징을 통합한 독특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유네스코 심사위원으로 화성을 방문한 실바(Nimal De Silva) 교수는 ‘화성의 역사는 불과 200년 밖에 안됐지만 성곽의 건축물이 동일한 것이 없이 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라고 하였다.



세계유산위원회가 지적하듯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전된 과학적 특징을 모두 국의 성곽과는 그 재료에서 차이가 있다. 중국의 축성방식인 벽돌의 사용을 받아들여 돌과 벽돌을 성재(城材)로 과감하게 활용하여 그 외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성곽의 기초와 축성에 있어서도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배려하였다. 하지만 화성의 주재료는 중국의 성곽과는 달리 석재가 대부분이다. 결국 화성은 18세기에 만들어진 전 세계의 군사시설물로 사용된 성 중에서 석재를 사용한 유일한 성곽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화성은 성곽을 지키는 군사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장치가 특별나게 고안되어 있다. 18세기 조선의 성곽 축조에서 성가퀴는 중요한 설치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경제적인 비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가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부족이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화기(火器)의 발전에 맞추어 공격과 방어가 가능한 성가퀴를 설치하였다. 원총안과 근총안 및 궁수(弓手)들이 자연스럽게 활을 쏠 수 있는 타구를 만든 것은 기타의 성제(城制)와는 다른 과학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



화성은 치성(雉城) ․ 옹성(甕城)․ 공심돈(空心墩) 등 우리 성제에서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축성방식을 도입하였다. 위의 축성방식은 중국의 오랜 전통 축성방식이었으나 그 효용도는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성벽을 돌출시켜 적의 동태를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용이한 치성이나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옹성은 화성의 독특한 군사시설물이다. 공심돈은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돈대이자 불랑기포 및 백자총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는 시설물이기도 하다. 화성의 각 시설물들은 동일한 모양이 없이 지형에 따라 약간의 차이성을 보이고 있다.



성곽 축성에 있어서 높은 언덕과 산지 부분에서 성벽을 쌓을 때 성의 외면을 깎아 내려 규형(圭刑) 쌓기를 하여 성벽의 무너짐을 방지하였다. 이는 기존 일자형(一字刑) 성벽 쌓기의 폐단을 극복하여 과학적 축성방식을 도입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화성 성역에서 특기할 점은 축성 능률을 올리기 위해 과학기기의 이용이 두드러졌다. 축성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새로운 운반 도구인 유형거와 거중기는 축성 기간의 단축 뿐 아니라 비용의 절감을 아울러 가져왔다.

유형거는 11량이 창안 ․ 제작되었는데, 이 수레는 짐을 싣고도 경사지에 쉽게 올라갈 수 있어서 석재 ․ 목재 등을 운반하는데 편리하고, 바퀴 또한 튼튼한 것이 특징이다. 거중기는 이전에 민간에서 사용하던 녹로(轆轤)의 원리를 한층 발전시킨 것으로서, 성역 이전에 정조가 내려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여 정약용이 왕명을 받들어 설계한 것이다. 이는 무거운 건축자재를 들어 올리는 데 작업 능률을 4, 5배 향상시킬 수 있는 구조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한 과학적인 기자재였다.







또한 화성에는 당시의 농업생산력 발달 추세에 부응하여 만석거저수지 등 수리시설과 대유둔(大有屯, 일명 北屯) 등 시범농장을 설치하고 여기에 최신의 수리 및 영농기술을 적용함으로써 화성은 전국적 농업개혁을 선도하는 도시로 떠오르게 되었다. 화성 건설과정에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고안한 거중기(擧重器)와 여러 최신의 기술이 실용화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수차(水車) 등 외래의 기계와 수리기술이 시험되고,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과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등 학자들이 구상하였던 농업론이 실현되는 등 우리나라 농업발달사에 획기적 사건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국왕 정조는 성역에 종사하는 각급 실무자와 부역꾼에게 제중단과 척서단을 나누어주면서 질병 예방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해 여름 혹심한 가뭄이 들자 공역을 일시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1795년 11월에는 장차 닥쳐올 추위에 대비해서 털모자와 무명을 준비해 장인 한 사람당 모자 하나에 무명 한 필을 나누어 주었다. 정조는 호궤(犒饋)라 하여 때때로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공사가 시작될 때나 공사가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모두 11차례 거행하였다.



화성성역 과정에는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1789년 수원신읍치 조성과정에서의 경험을 살려 종래의 강제성을 띤 징발 부역군 대신 기술자와 잡역부 전원을 전국에서 모집하여 철저한 임금을 지불하였다. 이는 민생적 차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위민정책(爲民政策)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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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
  218.148.139.74 2014-08-27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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