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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신라의 고분 문화 김용성 중원문화재연구원장 2010.05.28
<신라의 고분 문화 -김용성(중원문화재연구원장)>







고분이란 넓은 의미로 옛무덤이란 뜻으로 가까운 과거나 현대의 무덤을 포함하여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좁은 뜻으로는 옛날의 왕이나 왕족 또는 귀족과 같이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무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고분은 시체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의 종류에 따라 널무덤(棺墓), 덧널무덤(槨墓), 방무덤(室墓)으로 나뉘고 이것은 순차적으로 발전해온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무덤을 표지하기 위하여 위에 흙이나 돌을 쌓아 분구(墳丘)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라의 무덤은 크게 네 단계로 발전해 갔다.



제일 첫 번째의 단계는 나무널을 사용하던 시기(木棺墓段階)로 기원전 200년 무렵부터 기원후 150년 무렵까지이다. 이때의 무덤은 땅을 파고 그 안에 청동칼(細形銅劍), 청동거울 같은 것들과 함께 주검을 넣은 나무널을 넣고 나무널 주변에 그릇 같은 것을 껴묻은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이시기의 무덤 분포와 출토유물은 지금의 경주시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세력집단이 형성되지 않았고 주변의 몇 지역들이 세력을 모아 할거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알려주는데, 혁거세가 왕으로 등극할 때 나오는 6촌이 “산간지곡(山間之谷)에 분거(分居)”하고 있었다는 것과 연결되고 있기도 하다.



두 번째의 단계는 덧널무덤이 사용된 시기(木槨墓段階)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분이 만들어진다. 이 무덤이 사용된 시기는 기원 150년 무렵부터 기원 350년 무렵까지로 알려져 있다. 이때의 무덤은 땅을 파고 그 안에 덧널을 축조하였는데, 그 안에 다시 주검을 넣은 나무널을 넣는 경우도 있으나 주검을 바로 넣는 경우도 있다. 이시기의 무덤에서 특징적인 것은 순장의 시행과 강력한 철제무기가 많이 출토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이때는 신라가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아직 경주 주변의 다른 지역과 경주지역의 무덤 사이에는 그 크기나 껴묻거리(副葬品)에서 커다란 차이가 없음으로 보아 지금의 경주시 정도의 영역을 다스리는 조그만 나라로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사로국).





세 번째의 단계는 크고 높은 봉토를 올린 무덤, 즉 고총이 만들어지던 시기(高塚段階)이다.

경주지역에는 봉토로 돌을 먼저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마무리한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으나 경주의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들에서는 돌덧널무덤(石槨墓)에 크고 높은 봉분을 올린 것을 위주로 여러 가지 종류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무덤들이 만들어지던 시기는 대략 기원 350년 무렵부터 기원 530년 무렵까지이다. 이 시기는 신라의 마립간시대에 해당되고 이때부터 신라가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출토유물, 특히 금공품의 경우 신라가 각 지역의 지배집단에게 복식의 사여와 같은 방식으로 분여하여 지역 지배집단이 이를 위세품(prestige goods)으로 활용하면서 소속지역을 독립적으로 다스리게 한 간접지배 형태의 지배체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네 번째 단계는 돌방무덤이 만들어지는 시기(石室段階)이다. 이 시기는 기원 530년 무렵부터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이다. 이 무덤은 돌로 쌓아 방을 만들고 그 안에 주검을 넣는 무덤인데 방의 한 쪽에 출입구를 두어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위에는 흙만으로 만든 둥근 봉분을 씌웠다. 이 무덤들은 한 무덤에 두 사람 이상의 주검을 넣고, 많은 유물을 넣지 않고, 앞 시기의 것과 같이 크게 만들지 않았다. 이것은 이제 신라가 완전한 국가로 성장하여 무덤을 통해 자기집단의 세력을 과시할 필요성이 없어져 경제적인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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