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역사와 문화 지명(地名) 유래(由來)

서둔동(西屯洞)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나누었을 때 북부에 속한 지역이다. 1899년 발간된 『수원군읍지』에 표기된 북부 14개 동 중서둔촌이 바로 이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후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서둔촌과 매산리 일부를 합쳐‘서둔리’라 하여 일형면 관할이 되었다.
1936년 10월 1일 조선 총독부령 제94호에 의하여 수원읍이 확장 될 때, 이 지역은 수원읍으로 편입되었다. 이 때의 명칭은 서둔정(西屯町)으로서, 전형적인 일본식 명칭이었다. 이러한 이름은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서둔동으로 바뀌게 된다. 현재 탑동과 함께 행정동 서둔동에 포함되는 법정동이다. 서둔이라는 동 이름은 정조가 화성을 축조할 때 그 서쪽에 축만제를 만들고 그 물을 이용하여 둔전(屯田)을 경영하였던 것에서 유래한다. 즉 서둔이 설치되고 경영되었던 곳이므로 서둔동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서둔(西屯)
 

서둔은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후 수원을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자립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해 운영한 국영 농장이었다. 서둔은 화성의 서쪽인 화서문 밖에 있었다. 정조는 새도시 수원을 자립 도시로 육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썼다.


특히 화성을 유지하고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의 재원(財源)을 마련하기 위하여 화성 밖 동·서·남·북 사방에 저수지를 파고 둔전(屯田), 즉 국영 농장을 설치, 운영하였다.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를 파고 대유둔전(또는 북둔)을 운영하였다. 태안면 안녕리에는 만년제를 파고 만년제둔을 운영하였다. 화서문 서쪽에는 축만제를 파고 축만제둔 즉 서둔을 운영하였다. 축만제는 지금의 농촌진흥청 옆 서호를 말한다.

 

서둔은 대유둔의 두 배 이상 되는 넓이였다. 이 넓은 농장에서 거둬들이는 많은 수확으로 경제적 기반이 뚜렷한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이처럼 서둔이 설치, 운영되던 곳이어서 서둔동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수원의 농업 도시의 전통은 이처럼 2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 온 것이며 지금도 농업 진흥청, 서울 농생대가 있어 농업 연구 도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건등
 

『화성지』『수원군읍지』에 서둔촌이라고 나온다. 서둔동을 예전에는 건등, 건등굴, 권동이라고 불렀다. 이 곳에 권동 방죽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구부랭이
 

서둔동에 있는 길이다. 점터에서 여기산으로 가는 길을 말한다. 길이 매우 구부러져 있어서 그 모양을 보고 구부랭이라고 하였다.



골말과 성황제
 

탑동에 있는 골말은 본래 형석면 곡촌이었다. 공석(空石:구운동) 아래에 있다고 하공석이 라고 한다. 탑골의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깊은 골짜기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원 지역에서 현재까지 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우봉 이씨와 전주 이씨들이 가장 오래된 거주민들이며 그 외 손씨·홍씨·정씨 등이 살고 있다. 이 곳은 정조 대왕이 사도 세자의 능행차 때 다니던 옛날 소리길로‘왕대미’라는 지명이 전한다.



웃거리
 

지금의 구운 중학교와 삼환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사거리 지점에 있다. 서둔동의 윗쪽이 되므로 웃거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또는 벌말이나 탑골보다 위쪽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웃거리는 교통의 요지로 중요한 위치이다.

 

 
뒷골
 

여기산 너머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산구렁텅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아 인적이 드물었다.
여기산 뒤에 있어서 뒷골이라고 하였다.



바람재산
 

탑동 98-4번지, 현재 탑동 구획 정리 지구내 삼성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골말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던 산이라는 뜻에서 바람재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벌터
 

마을 벌터 마을은 수원역과 서울 농생대 정문에서 남쪽인 잠사 곤충 연구소 근처에 있던 마을을 말한다.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넓은 들판 사이에 마을이 형성되어 생긴 지명이다. 현재도 서둔동 사람들은 이 지역을 벌터라고 부른다.



빙구재
 

탑동 272-1번지 탑동 구획 정리 지구에서 서부 우회 도로 방향 쪽에 옛날에 얼음을 보관하던 곳이 있었는데 이 곳을 빙구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새말
 

새말은 서울대 농생대 남쪽 탑동과 평동 경계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샛가지·새까지
 

서호 방죽이 있는 곳의 논, 밭을‘샛가지’또는‘새까지’라고 불렀다.
확실한 지명 유래는 잘 알지 못한다.



푸른 지대
 

탑동 505번지 일대를 말한다. 서울 농생대 뒤는 넓은 들판이었다. 60년대초 개성 사람인 박준철이란 사람이 묘목, 딸기, 포도 등 과수원을 경영하였다.
이 과수원이 널리 알려져 서울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고 한다. 딸기나 포도로 담근 술도 팔았다고 한다. 이 곳은 지금까지도 푸른 지대로 불러오고 있다.

 

 
여기산 집자리 유적
 

여기산 전체에는 무문 토기 중기부터 철기 시대 초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집자리 유적이 있다. 숭실대 박물관이 몇 개의 주거지를 발굴한 외에도 한양대 조사팀도 주거지를 발굴하였다. 이 집자리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 바닥에 볍씨 자국이 있고, 난방 시설을 한 진흙 속에 볏짚을 혼합한 흔적이 뚜렷하여, 저습지인 이 지역에서 벼농사가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왕대미
 

탑동 297번지 일대의 마을을 왕대미라고 불렀다. 정조 대왕이 사도 세자의 능 행차 때 다니던 옛날 소리길이어서 왕대미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참나무
 

서둔동 150-2번지 지금의 서둔동 성당에는 수령이 약 600년 된 커다란 참나무가 있었는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30년 전 성당이 지어지면서 베어져 지금은 없다. 옛부터 이 참나무를 베어내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고 했으며, 실제로 이 나무를 베어 내고 나서 한 사람이 불구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이 참나무에 대한 신성함과 신앙심을 잘 말해주고 있다.



탑골·탑의 좌대
 

현재의 탑동은 옛부터 탑골이라고 불려왔다. 탑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탑동 485번지에 탑의 좌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탑이 건립된 것은 확실하다. 탑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풍수 지리학적으로 보아 수구(水口)를 막는다는 뜻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수구를 막기 위하여 탑의 좌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40m와 남쪽으로 70m 양면에 우리나라 토종 홍송 수십 그루를 심어서 방패로 삼았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북쪽과 남쪽에 14그루가 서 있었다. 이처럼 탑이 있다고 해서 탑골이라고 불렸으나 정확한 탑의 건립 연유와 연도는 찾을 수 없다. 수령 700년 된 향나무 한 그루만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