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역사와 문화 지명(地名) 유래(由來)

팔달로(八達路)
 
1789년 수원부의 읍치(邑治)가 옮겨 오기 전 이 지역은 수원부에 속하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1789년(정조 13) 9월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기고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나누었다. 이 때 남부에 속하였다. 이후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남창리와 남수리 그리고 산루리 일부 지역에 분할되어 있었다. 1931년 4월 1일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자 본정(本町) 1·2·3·4정목(丁目)으로 편제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자 본정 4정목은 팔달로 1가, 본정 3정목은 팔달로 2가, 본정 2정목은 팔달로 3가로, 본정 1정목은 중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따라서 ‘팔달로’라는 이름은 해방 후에 처음 생긴 것이다. 1963년 1월 1일 동 통합 때 팔달로 1·2가와 남창동은 팔창동 관할로, 팔달로 3가는 영천동 관할로 되었다. 이후 1985년 12월 2일 수원시 조례 제1297호에 의하여, 팔창동과 영천동이 합해지면서 남창동, 영동, 중동, 구천동 등과 함께 팔달동 관할로 들어가게 되었다.


남문성꿀
 

팔달문 안에 있는 옹벽을 말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남문이라고도 불리는 팔달문 안 옹벽 틈에서 겨울이 되면 꿀이 흘러 나와서 근처의 사람들이 꿀을 찍어 먹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까닭으로 이 옹벽을「남문성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당분(糖分)이 들어있는 돌이 옹벽의 재료가 되어서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도화동
 

팔달동에 있었던 마을이다. 남문 로타리에서 종로 방향에 있었으며, 현 백내과 병원 뒷편 지역이다. 도화동이라는 이름은 복숭아꽃이 많이 피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뽕나무밭·뽕나무밭머리
 

팔달동 93번지 일대에 있었던 밭이다. 현재 팔달동 사무소 주변으로 예전에 뽕나무밭이 있어서, 「뽕나무밭」또는「뽕나무밭머리」라고 불린다.



 
수원면사무소 자리·수원읍사무소 자리
 

현재 팔달로 2가 남진 상회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과 그 주변 일대이다.
본래 이 자리는 수원면사무소였다가 1931년 수원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읍사무소로 바뀌었다.



3·1 운동 기념탑
 

팔달산 서남암문 옆에 있는 기념탑이다. 수원의 독립 운동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그 오른쪽에는 해방 직후 화홍문 옆 중포산에 세워졌던 구비(舊碑)도 이 기념탑 옆에 옮겨 놓았다. 일제 강점기 당시 수원면에서 처음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은 3월 1일 화홍문에서였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정황이나 증거가 미약하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할 때, 3월 16일에 벌어진 만세 운동이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날은 장날이었는데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와 창룡문쪽 연무대에서 각각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를 향하여 행진을 했다.
그후 3월 23일에는 수원역 근처 서호에서 약 7백명이 시위를 벌였고, 3월 25일에도 25명의 청년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3월 25일에 있었던 시위 주동자의 검거에 대한 항의 표시로 3월 27일에는 인근

 

상인들이 상점 문을 닫는 철시(撤市) 투쟁을 감행
하기도 했는데, 이 때 약 40%에 달하는 상점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3월 28일에도 3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3월 29일에는 수원 기생조합의 기생 약 30명이 자혜 병원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날 밤에는 상인과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불렀고,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는 등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시구문·시구문턱
 

팔달로 3가 영동 시장 쪽에 있던 문이다. 팔달문 동쪽 200m 지점에 있었다. 옛날 성안에서 부정하게 죽거나 전염병 등으로 죽은 이들의 시체를 성밖으로 옮길 때 이용하던 문이어서 ‘시구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시구문턱」이라고도 부른다.



 
야시장(夜市場)
 

팔달문에서 지금의 수원 극장 앞까지 대로변에 있었던 시장이다. 야시장은 1934년에 생겼는데, 일제가 기존 상권(商權)을 거의 장악한 이후, 시장도 늘리고 한국인 상인들의 숨통을 터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김형기, 에구치(江口) 등 10여 명이 발기하여 시장을 열었는데, 당시 일본인들이 거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이 영세한 우리 상인들의 참여가 높았다고 한다.



 
종로(鐘路)
 

구 중부 경찰서에서 종로 사거리를 거쳐 매향교에 이르는 총 연장 250m의 도로와 그 주변에 형성된 거리이다. 화성 축성 후 이 일대는 서울의 중심지인 종루(鐘樓)와 같이 번화한 모습을 보여서, 수원의 중심지라는 의미로「종로」라 하였다 한다. 이 지역의 번화한 모습은 이희평(李羲平)이 쓴 화성일기(華城日記) 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가(十字街)·십자로(十字路)
 

장안문과 팔달문을 잇는 남북 도로와 창룡문과 화성 행궁에 이르는 동서 도로를 말한다. 남북 도로와 동서 도로가 직교한 형태가 열 십자(十)를 닮았다 하여 「십자가」라 이름지어 졌다. 화성성역의궤 에는「십자로」라 나와있다. 18세기 말 새로운 상업 중심 도시로 탄생된 수원은 여러 점에서 종래의 도시들과는 달랐다. 상업이 활발한 새 도시다운 면모가 두드러졌는데, 수원의 중심부를 이루는 십자가가 그 중 하나였다. 수원부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 도로는 장안문과 팔달문을 잇는 남북 도로였다.


그리고 이 남북 도로의 중간에서 도로를 직교하여 서쪽으로는 얼마 가지 않아 부의 관아인 화성 행궁 정문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창룡문에 이른다. 십자가란 바로 이 남북 도로와 창룡문에서 행궁으로 이어지는 길이 직교하는 도로의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 지방 도시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동서남북이 교차하는 직교 도로는 쉽게 볼 수 없다. 그런데 수원의 도로 중심부 명칭을 십자로로 명명한 것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중세적 도시의 발상과는 전혀 상반된다. 수원의 사통팔달의 정신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문을 낸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지방 읍성이 대개 동문, 서문, 남문의 세 방향의 문만을 둔 데에 비해, 화성에는 네 방향의 문을 낸 데에서, 사통팔달의 정신이 담겨있는 것이다. 십자로가 동서남북으로 완벽하게 관통되지 못한 것은 서쪽에 주산(主山)인 팔달산이 있고, 또 서쪽 방향 도로의 정점에 관아와 행궁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십자로는 한번 꺽여서 화서문으로 연결된다.



팔달사(八達寺)
 

팔달동 115번지에 있는 절이다. 남문에서 팔달산 방향의 로얄 극장 옆 도로변에 있다. 1917년 윤흥자 스님이 포교를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홍난파 노래비
 

수원 출신의 음악가인 홍난파(1898 ~ 1941)를 기리는 비이다. 팔달산 공원내 남포루 아래에 있다. 난파가 태어난 지 70돌이 되는 해인 1968년 10월 15일에 세워졌다. 홍난파의 본명은 영후(永厚)이다. 대표작으로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봄처녀 등 민족적 정서가 담긴 노래와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가 있다. 작품집으로는 조선 동요 100곡집, 바이올린 독주곡 등이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가, 음악 평론가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역할을 하여, 한국 양악사(韓國洋樂史)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말년의 친일 행위로 인하여 후대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