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역사와 문화 지명(地名) 유래(由來)

이의동(二儀洞)
 
이의동 이 지역은 본래 용인군 지내면(枝內面)에 속한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의상(儀上)과 의하(儀下)를 합하여 이의리(二儀里)라 하여 용인군 수지면 관할이 되었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하리와 함께 용인군 수지면 관할에서 수원시 관할로 변경이 되었고, 같은 날 수원시 조례 제1118호에 의하여 행정동 이의동 관할 하에 있는 법정동 이의동이 되었다.


1988년에는 장안구에 속하는 행정동이었는데, 1993년 1월 20일 수원시 조례 제 1837호에 의하여 팔달구가 설치되면서 팔달구 이의동이 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현재 이의동의 면적은 12.434㎢이며, 관할 법정동으로는 이의동과 하동이 있다. 이의동이라는 이름은 의상과 의하 두 마을을 합쳐 이의리라 불려 오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금광수리·금광
 

신대 저수지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금을 광주리로 캘 정도로 금이 많이 났던 지역이라고 해서 ‘금광수리’라고 불린다는 유래가 전해온다. 또는 금광수리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어느 농부가 이 동네 밭에서 금을 캐는 꿈을 꾼 후, 실제 그 밭에서 광주리 만한 금을 파냈던 데서 연유하는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와는 달리 옛날 금을 캐던 광산이 있었기 때문에 금광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갱들

 

훗골말(호꼼말) 서쪽 원천 저수지 위에 있는 들이다.



 
긴혜령곡 고개·진시낭굴 고개  
 

이의동 243번지 일대에 있는 고개이다.‘혜령군의 묘가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긴 고개’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진시낭굴 고개’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느티나무
 

이의동 399번지에 있는 나무이다. 심온 선생 묘소 앞 마을에 있다. 350~500년 정도 된 나무로서 높이가 16m, 둘레는 3.2m이다.



능안
 

수원시 폐기물 적환장 일대에 있는 마을이다. 이의동 4통 지역이다. 능안이라는 이름은 심온 선생의 묘역을 능으로서 예우를 하여 능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다. 즉 심온 선생 묘소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동역골·동역굴·동역(東域)
 

이의동 3통 지역에 있는 마을이다. 산의실 동남쪽에 있으며, 동역골, 동역, 동역굴 등으로불린다. 이 마을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산이 푸르고 물이 맑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조사한 수원의 동족 마을에서도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에 청송 심씨 동족 마을이 형성되어 50세대가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릉리(杜陵里)·두렝이·의상(儀上)
 

쇠죽골과 성죽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이의동 1통과 4통 일대에 해당하며, 쇠죽골과 성죽골 사이로 벌말까지 뻗어 내린 구릉의 끝자락에 있다. 두릉리라는 이름은 마을 주변 구릉에서 봄부터 두견이가 울어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이 마을은 두렝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의상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산의실 마을 위쪽(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산
 

심온 선생 묘소 뒤에 있는 산이다. 산의 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다. 조산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심온 선생 묘소 좌우로 망부석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공원 마을
 

이의동(하동) 제7통 지역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마을 이름은 개천동, 구천동 등으로 불리었는데, 1993년 반상회를 통한 결의로 공원 마을로 바뀌게 되었다. 원천교 옆 마을 입구에 공원 마을이라 쓰여진 표지판이 있다. 이 마을은 원천 유원지 개발로 다른 곳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많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원래 용인군 수지면 하리에 속했으나, 수원시로 편입되게 되어 하 3통에서 4통으로 분통되었고, 이후 지금의 이의 7통으로 개편되었다.



뒤릉·능뒤·두릉(杜陵)·두빙이
 

이의동 51번지~356번지 일대에 있는 마을이다. 산의 초등학교 앞 구멍 가게가 있는 일대이다. 뒤릉은 능(심온 선생 묘소) 뒤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능뒤’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능 뒤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두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나라에 충정을 다 바치고도 죽음을 당한 심온 선생의 억울함이 한이 되어 두견새가 밤마다 슬피 울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그밖에 두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말무덤산
 

금광 북동쪽에 있는 높이 75.1m의 산이다. 신대 저수지 바로 밑에 있다. 신대 저수지 뚝방 밑 왼쪽으로 가면 쌍다리가 나오는데, 이 쌍다리 중 아래에 있는 다리를 지나 원천 저수지로 넘어 가는 고개 길에 있다. 장군이었던 주인이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다가 말 위에서 전사하자, 주인을 그대로 태우고 고향까지 찾아온 말의 무덤이 이 산에 있다고 한다.



버들치 고개
 

새말, 안골 마을 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선이 된다. 옛날 이 고개 양쪽이 늪지대였으므로 버들이 무성하여 키나 고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버들을 많이 채취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버들치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남경 모퉁이·남경
 

원천 유원지 매표소에서 방죽쪽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이다.‘남경’이라고도 불린다.

 
시아리 서쪽산·빈더구니·분터골·빈터구니
 

이의동과 용인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하리 서쪽에 있기 때문에 시아리 서쪽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마 심하리 서쪽에 있는 독산을 이렇게 부르는 듯하다. 이 산에는 분터골, 빈터구니라 불리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에 있는 바위가 독바위와 싸워서 금이 많이 갔기 때문에 분해서‘분터 바위’가 되었고, 골짜기 이름은분터골 또는 빈터구니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산의실(山儀室)
 

이의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산의실이라는 이름은 이 마을에 있는 심온의 묘소와 연관된 이야기가 전한다. 심온은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의 장인으로, 영의정으로 있다가 1418년 12월 무고로 수원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묘는 용인현 산의곡에 있었는데, 심온의 외손자이자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과 둘째 아들 세조가 외조부 묘소를 참배한 후부터 마을 이름이 산의실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어원학적으로 보면, 보통 실은 골짜기[谷] 또는 마을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산의 실이라는 이름은 산 골짜기 마을 또는 산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상산구니·상산군(商山君)
 

이의동에 있는 자연 마을로서, 벌말과 소적골의 중간에 있다. 상사구니 또는 상산군이라 불리는 이 마을 이름은 황효원(黃孝源 : 1414~1481년)과 관련된 유래가 전해진다. 황효원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자영(子永), 시호는 양평(襄平), 본관은 상주(尙州)로 세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최초의 보신각 종을 만들었으며, 양관 대제학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오르며 좌익 및 좌리공신에 책록되어 상산군에 피봉되었다. 그가 이 곳에 묻히게 된 연유로 상산군 또는 상산구니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시아리들
 

영동 고속도로 동수원 인터체인지 입구 일대에 있는 들이다. 심온 선생 묘소가 내려다 보이는 곳 우측에 있는 들판으로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유난히 잘되는 곳이라고 한다.


중촌(中村)
 

태평양 화학 주변에 있었던 마을이다. 현재 원천 저수지가 있는 지역에 있다. 윗말과 아랫말 중간에 있었던 마을로 원천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었다고 한다.



 
성죽골·승죽골
 

이의동 제4통 지역을 일컫는 마을 이름이다. 동수원 인터체인지 위쪽에 있다. 성죽(成竹)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조리를 만드는 대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것이다.지금도 691번지 김수종 씨댁(金洙宗氏宅) 부근에는 많은 대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이 마을은 새말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불리어 진 것이라 한다. 현재는 새말이라는 이름은 쓰이지 않고, 성죽골 또는 승죽골로 불리운다. 이 마을에는 조선의 정치가이자 외교가인 눌암 김찬(金瓚)의 묘소가 있다. 그는 1543년-1599년 때의 인물로 자는 숙진(叔珍)이고 호는 눌암, 시호는 효헌, 본관은 안동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대사헌으로, 1594년에는 접반사로 명나라 지원군의 인도와 일본군과의 강화 회담에 크게 활약했으며, 예조 판서, 자의금부사, 대사헌, 이조 판서,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수습의 막후 절충을 성공시킨 외교가이자 경제 정책의 전문가요, 이름있는 문장가이다.


쇠죽골·소죽골·소마당·새말
 

이의동 북쪽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소죽골, 소마당, 새말 등으로도 불린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소를 실마리로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전한다. 첫 번째는 소[牛]와 연관된 이야기이다. 산칡넝굴 등 소먹이가 많은 곳으로, 광주군, 낙생면, 운중동, 태장 등에서 수원으로 들어오다가 이 마을에서 쉬면서 소의 먹이를 주고 물을 먹였기 때문에 소죽골, 쇠죽골, 소마당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소를 가축 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작다라는 의미를 가진 소(小)로 보아서, 죽골보다 작은 골짜기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소죽골 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신대(新垈)
 

윗여수내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신대라는 이름은, 새로된 마을이라 해서 새터라 불리는 이름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안골
 

산의실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수원 인터체인지 위쪽 지역이다. 벌말 동쪽 산밑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이라 해서 안골이라 불린다고 한다.



양지작말
 

원천 저수지 서쪽아래 있는 마을이다. 일제 강점기에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에‘양조장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양지작말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 유래로 보아 양조장말 또는 양조장 마을이라 부르는 것이 올바를 듯 싶다.



왯벌
 

산의 초등학교 앞에 있는 들판이다. 토양이 찰흙으로 되어있어 비가 오지 않을 경우 땅이 굳어 농사짓기가 아주 힘이 들어 왜놈들처럼 나쁘다고하여 왯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왜놈들처럼 나쁜 땅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의동 공동 묘지
 

경기대 정문에서 경기도 경찰청으로 가는 도로 주변에 있는 공동 묘지이다. 수원시의 매장지였으나, 지금은 인근 지역의 개발로 인하여 묘지들이 거의 이장되었다.



좌호개
 

두렝이에서 경기대를 지나서 광교 저수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땅의 형세가 고개 위에 호랑이가 앉아 있는 형상이어서, 이 근처에서는 개가 잘 자라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실제로 이 근처에서는 개를 사육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유래로 보아 좌호란 이름은 앉을 좌(坐) 자와 호랑이 호(虎) 자의 합성어로 보인다. 따라서좌호개 란‘호랑이가 앉아 있는 지세를 갖춘 고개’라는 의미가 된다.



혜령골·시령골·세령골·시륭골
 

이의동 243번지(제2통) 일대를 일컫는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의 이름은 조선 3대 태종(太宗)의아홉번째 아들인 혜령군(惠寧君)과 관련된 유래가 전한다. 혜령군은 태종 7년 3월 10일에 출생하여 세종(世宗) 23년 6월 25일에 죽었다. 처음 혜령군의 묘는 동문 밖에 있었으나, 세종 25년 왕의 특명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 이후로 이 묘가 있는 일대를 혜령골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혜령군의 묘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마을은 시령골, 세령골, 시륭골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 모두가 혜령골이라는 이름에서 변한 것으로 보인다.



혜령군 묘
 

혜령골 서쪽에 있는 태종의 아홉번째 아들이자, 세종의 배다른 동생인 혜령군 지(祉)의 묘이다. 묘역 맨 위에는 혜령군과 부인의 무덤이 나란히 있고, 그 앞에 묘갈과 문인석이 있다. 혜령군 부부 묘 아래로는 그 아들 예천군과 손자 죽산군의 묘가 있다. 묘 앞에는1994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1499년에 세운 죽산군의 비가 있다.



진고개
 

산의실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화약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한다. 이 고개의 이름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보통 진고개란 이름은 땅이 질어서 붙여진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