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역사와 문화 지명(地名) 유래(由來)

권선동(勸善洞)
 
이 지역은 본래 수원부 장주면에 속한 곳이었다. 1899년에 발간된 『수원군읍지』에는 장주면 권선리(勸善里) 또는 적사리(赤寺里)라고 표기되어 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그대로 권선리라 하여 태장면 관할이 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태장면으로 편제되었다.


이 지역이 수원시로 편입된 것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5호에 의해서이다. 이 때 장지리, 평리, 대황교리, 곡반정리 등과 함께 곡선동 관할이 되었다. 이후 1995년 3월 16일 수원시 조례 제1941호에 의하여 권선구 곡선동에서 권선동이 분리되면서 독립적인 행정동이 되었다.


2000년 10월 현재 권선동의 인구수는 25,893명으로 남자가 12,994명, 여자가 12,899명이다. 권선(勸善)이라는 동 이름은 고려말 한림학사 이고(李皐)가 벼슬을 내놓고 이곳에 살면서 백성들이 어질고 착하게 살기를 권하였는데, 그의 높은 인품과 가르침에 많은 백성들이 감화되어, 어질고 착하게 살고자 노력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즉 이고가 선함을 권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권선이라 칭하게 된 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권선동
 

·상권선·하권선 고려 말 한림학사 이고가 벼슬을 내놓고 이 곳에 살면서 후진들을 위하여 어질고 선함을 가르쳤으므로 권선리, 권선동이라 하였다. 이고는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사람들에게 항상 가르침을 주기를‘자기와 이웃에 항상 착하게 살아라’라고 일러왔다. 인근 사람들은 그 분의 높은 인품과 가르침에 따라 착하게 살게 되었다. 그후 이 마을의 이름을 권선리라고 불렀다. 권선동은 예전에는 들을 사이에 두고 위, 아래의 두 마을로 나뉘어 있었다. 윗쪽 뜸을 윗 권선(상 권선), 아래쪽 뜸을 아랫 권선(하권선)이라 불렀다. 현재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농수산물 도매 시장 남쪽 도로를 경계로 아랫쪽(남쪽)은 곡선동사무소에서, 윗쪽(북쪽)은 권선동사무소에서 관할하고 있다.


새터·새말
 

권선 주공 아파트 동쪽에 있던 마을로, 새터·새말이라 불리었다.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지금은 택지 개발에 밀려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신라물 제언(新羅勿堤堰)
 

『수원부읍지』제언편에 따르면 장족면(長足面)에 있는데, 둘레 940척, 깊이 3척이라고 하였다. 『화성지』에는 신수원부 치지로부터 동쪽으로 10리 장주면(章洲面)에 있다고 하였다. 장족면은 1890년대에 장주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제언은 지금의 권선동, 원천동, 영통동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압각수(鴨脚樹)
 

고려 때 한림학사였던 이고가 자기 집터에 심었다는 은행나무이다. 권선 종합 상가 동북쪽인 권선동 노인 회관 앞마당에 있다. 권선동 533-4번지이다. 이 은행나무는 권선징악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은행나무의 높이는 25m, 가슴 높이의 둘레가 4.4m이며 수령은 약 4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원시의 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용화출(龍化出)
 

마을 권선 동쪽에 있는 용화출 고개 밑에 있던 마을로 옛날 이 고개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지금은 택지 개발로 마을이 없어지고 아파트와 선일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이 고개 근처에 수원시 화장장이 있다. 또 다른 유래는, 임광 아파트 뒤쪽의 산의 모양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기 직전의 모습과 같다고 용화출이라고 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또한 용이 비상하기 직전의 모습이 아니라 하늘로 비상하고 난 후 그 터가 빈 모습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용화출 마을의 유래는 모두 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학사 집터
 

이고의 집터를 말한다. 이학사가 벼슬을 내놓고 이 곳에 살면서 세상의 모든 일을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호를 망천(忘川)이라 하고 숨어 살았다. 조선의 태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세종 대왕은 이고의 뜻을 가상이 여겨 돌비를 내려‘고려 효자 한림학사 이고의 비[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之碑]’라 하여 크게 찬양하였다. 그후 금대영이란 사람의 부친이 이 곳에서 살았다. 그분이 지식이 높아 금주사라고 불렸다. 주사란 벼슬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네에서 어른 대접을 받은 지식이 많은 사람의 호칭이었다. 금주사는 이 곳에서 서당을 만들어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장교 제언(長橋堤堰)
 

『수원부읍지』제언편에 따르면 장족면에 있고 둘레 1,051척, 깊이 1척이라 하였다. 또 『화성지』에는 신수원부 치지로부터 동쪽 10리 장주면에 있다고 하였다. 길이가 800척, 넓이 430척, 높이 4척, 두께 4척, 깊이 3척5촌, 수문 두 군데, 저수지 물로 농사지을 수 있는 논(몽리답)은 50섬지기라고 하였다. 앞에서 말한 신라물 제언과 위치가 비슷하다.



장다리
 

권선동 북서쪽 남수원 전화국과 권선 초등학교 사이의 큰 도로는 예전에 개천이었으며, 이 개천에는 장다리라고 부르는 다리가 있었다. 개천은 지금 현재 복개 공사로 인해 도로가 되어 있다.



적사리 제언(赤寺里堤堰)
 

『화성지』제언편에 따르면 신수원부 치지로부터 동쪽으로 10리 장주면에 있다. 길이 552척, 넓이 390척, 높이 4척, 두께 4척, 깊이 1척 수문 두 곳, 몽리답이 12섬지기라고 하였다. 권선리는 적사리라고도 불려졌다. 그러므로 적사리 제언은 지금의 권선동에 있었다. 옛 자료를 토대로 살펴볼 때 권선동에는 저수지가 여러 곳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대
 

권선 초등학교 옆 복개천은 조대라고 불렀다. 옛날 한림학사 이고가 이 곳에서 낚시를 하였다고 한다.



중간말
 

중간말은 상권선과 하권선의 경계 지점에 있었던 마을이다. 야트막한 산등성이가 있고 대여섯 집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도로 교통 안전 협회에서 세곡 초등학교 선상이라고 하나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