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역사와 문화 지명(地名) 유래(由來)

고색동(古索洞)
 
이 지역은 본래 수원부 용복면에 속한 곳이었다. 1899년 발간된 『수원군읍지』에 고색리(古索里)라 표기되어 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용복면의 고색리, 중보평(中洑坪)과 남부면의 지장동을 합쳐 고색리라 하여 안용면 관할이 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용복면 고색리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5호에 의하여 수원시로 편입되었는데, 이 때 평리, 오목천리와 함께 평동에 편제되어 오늘에 이른다.


당집

 

고색동 381-4번지 고색 문방구 뒷편에 당집이 남아 있다. 당집은 농경 생활에 뿌리를 둔 민속 신앙으로 일년 농사의 풍년을 염원하고 기도하던 곳이었다. 더불어 마을 주민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던 신성한 곳이었다.

 

 
     
 

 

 
움말·점촌·점터

 

고색동 887번지 고색 초등학교 뒷편은 쇳물을 부어 솥 단지를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느티나무 밑에 그릇 굽는 가마가 있어서 움말, 점촌, 점터라고 불렀다. 이 곳에서 도가니 등이 발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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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색동 고분·쪽박산
 

고색동 148번지의 야산을 쪽박산이라고 하는데 이 곳에서 고분이 발견되었다. 1988년 7월 한양대 최호림 교수팀에 의하여 AD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경질토기(硬質土器)가 채집되었다. 현재 이 고분은 많이 훼손되어 정확히 측정하기 힘들다. 대략 남북의 길이가 30m정도이고, 동서의 길이가 20m정도, 높이는 약 6m인 장방형의 고분이다. 고분의 북쪽은 도로 공사로 인하여 잘려 나갔으나 예전에는 손잡이 모양의 돌출 부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러한 모양은 일본에서 유행했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형태를 띤 것이다.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으며, 남쪽은 둥근 모양이면서 북쪽은 돌출 부분이 늘어져 있는 것이 전방후원분 형태이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힘들다. 이 고분은 현재 삼국 시대의 무덤이 아니라는 쪽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솔대

 

고색동 299번지 일대는 솔대라고 불리는 활터가 있었다. 고색동 지역은 예로부터 넓은 들판이어서 삼국 시대 때 격전장이었다고 한다. 군사 병기창 및 훈련장이 있었으며 활터도 있었다.

 

 
꼼작 우물  
 

고색동 887번지에 있는 이 우물은 움말(점촌) 사람들의 공동 우물터였다. 고색 초등학교 뒷편에 이 우물이 있다.

 
 

대촌·큰말
 

대촌은 큰말이라고 한다. 고색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도고산
 

도고산은 큰말 뒤에 있는 산으로 고색골이란 이름도 도고산 밑에 있어서 붙여졌다.


마룻들
 

고색동 274번지 일대의 들을 마룻들이라고 불렀다.



민속 줄다리기
 

수원 지역의 대표적인 민속 놀이로 고색동 민속 줄다리기가 있다.
이 줄다리기 행사는 아주 오래 전부터 행해져 내려 왔다. 화성 축성 이후 양반 계층과 평민 계층인 농민이 모두 참여하는 행사로 치뤄졌다. 행사 때마다 화성과 용인 지역은 물론 여러 풍물패도 참여하였다. 전성기 때는 30여 개의 두레패가 참가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일제 강점기에는 탄압으로 중단되었지만 감시의 눈을 피해 행사를 계속해 왔다. 해방 이후에 매년 행사가 이어지다가 1986년 2월 13일(음 1월15일) 고색동 주민 행사로 마지막 행해졌다. 다음 해인 1987년 10월 화홍 문화제 행사 때 한 번 더 시행된 후 중단되었다가 고색 청년회 중심으로 1995년 정월에 줄다리기 행사가 재연되어 이제는 고색동 주민의 제일 큰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줄다리기는 일년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고 액을 막으며 대동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행해졌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오후에 800여 명의 성인 남자들과 부녀자, 청년들이 나와 서로 편을 갈라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었다. 줄은 중심 부분이 지름 1m, 길이 100m 가량되게 짚을 꼬아서 튼튼하게 만든다. 줄은 매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상한 부분만을 다시 보완하여 이용하고 있다.



배다리
 

고색은 옛날에 지장리라고 했다. 이 곳은 비가 오면 흙이 너무 질어서 배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이 곳의 흙이 너무나 질어 시집온 지 삼년이 지나야 신발에 붙은 흙이 떨어진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땅이 너무 나쁘니까 거기로 가지 말고 좋은 길로 가라 배다리로는 가지 말라’해서 그런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칠정(七井)
 

칠정은 돌로 쌓아 올린 7개의 우물를 말하며, 고색동 74­5번지에 1개의 우물터가 남아 있었으나 현지는 흔적을 찾아 수가 없다.



비구재·학고재
 

고색동 7-42번지 일대의 고개를 비구재라고 불렀다. 학고재라고도 불렀는데 정확한 유래는 알지 못한다.



삼거리·삼가리
 

고색동 큰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세 갈래 길이 있어서 삼거리 또는 삼가리라고 불렀다.



오정(五井)
 

오정은 다섯 개의 우물을 말하는데 주로 서민층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공동 우물이 있었던 곳은 고색동 373-9번지, 376-2번지, 397-13번지, 373-14번지, 65-7번지에 있었다고 한다.



중보평(中洑坪)·중봇돌
 

현재 고색 10통 지역은 큰말 동북쪽 들에 있는 마을로 중보가 있어서 중보평, 중봇들이라고 하였다.